박진아

회화는 정말로, 무엇을 그리는가?

이수연
2024

『박진아: 휴먼라이트 』, Kukje Gallery, 2024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전시장에서 박진아 작가의 <밤 나무>(2008)를 처음 마주했을 때, 한참을 고민하며 바라보았다. 이것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을 재현하여 그리긴 한 것인가? 아니면 가상의 다른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가? 우선, 제목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밤에 본 나무”를 뜻하는 “밤 나무”일 확률이 높다. 작가는 실제 지구의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 나무를 밤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선택하여 목격하고 그렸을 것이다. “밤 나무의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나무이며, 작가가 본 특정한 위치와 시간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밤 나무의 그림”이 실제 존재하는 “밤 나무”를 재현하기 위한 그림인 것일까? 이파리와 줄기, 나뭇가지가 생략된 채 검은 화면에 둥둥 떠 있는 선과 면들은 일견 나무의 형태와 비슷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없게 만든다. 주변의 과감한 생략으로 나무가 서 있는 공간이 어디쯤 인지 확인할 길 또한 없다. 오히려 멀리서 마주했을 때, 이 그림은 초록과 검정색 중간 어딘가에서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여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을 부여한 강렬한 물감덩어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밤 나무”라는 제목은 그저 작가가 임의적으로 부여한 허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이 “밤 나무”는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이며, 작가가 어떤 순간에 목격했지만, 이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기억이 희미해지는 바람에 그저 물감덩어리로 축소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 경우, 이 “밤 나무”는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 회화는 정말로, 과연 무엇을 그린 것인가?

회화가 무엇을 그리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미술사에서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바 있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Gombrich)는 위대한 저서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에서 “보는 것(seeing)”과 “해석하는 것(interpreting)”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에 따르면, 보는 행위는 심적 장치(mental set)가 지각하고 해석하는 조율과정을 거쳐서 심리적으로 주목이 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1 따라서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회화가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의 중심에는 작가의 감정과 욕망의 표현, 혹은 회화를 보는 관찰자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재현(representation)의 방식이 위치하게 된다. 곰브리치는 회화가 무엇을 그리는가에 있어서 재현되는 대상의 이미지와 심리적인 상태를 연결함으로써, 회화가 그려지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 정신분석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부여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에 따르면, 작가가 회화를 “어떻게” 그리는가의 문제는 작가의 취향을 넘어서서 작가가 속한 시대와 사회가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흔적, 그리고 그 이전에 과거의 전통을 학습하여 그려왔던 도상과 양식의 영향을 증거한다. 따라서 마음 속에 집적된 인상들의 집합체와 이미지의 잠재적 가능성을 그림 그리기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곧 작가가 속한 세계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깨닫고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2

그러한 점에서 박진아의 회화가 작가의 주변을 소재로 하여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작가는 초기부터 사진을 이용하여 일상의 장면을 찍고, 이후 여러 장의 사진들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재조립하고 합성하여 회화를 작업하였다. 2000년대 초반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와 4컷 필름 카메라에서 똑딱이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를 거쳐 현재 주로 이용하는 핸드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진 기술의 발전에 발맞추어 사진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회화에 이용해 왔다. 그러나 작가는 사진 이미지를 전문적인 테크닉을 연마하여 완전한 결과물을 생산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철저히 사진을 과정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각 시기마다 가장 편하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는 카메라와 사진인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은 작가가 작업의 대상을 인지하고, 본 순간을 연속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도구로 작동한다. 작가는 사진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인 순식간에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는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화가의 눈을 대신할 도구로 카메라를 채택하였으며, 빠른 속도가 초래하는 오류, 혹은 결함을 보정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여러 사진을 찍은 후 한꺼번에 참조하였다.

이처럼 박진아가 사진을 이용하는 방식은 속도와 닮음이라는 두 개의 특징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데, 이 두 개의 특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진이 닮음(likeness)의 기술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순간을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사진이 발명된 이래 회화작가들이 항상 의식해 왔던 오래된 전통의 일부이다.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 Baptiste-Camille Corot)는 도시의 풍경을 스케치할 때 당시 사진에서 거리풍경을 찍기 위해 사용한 구도와 프레임을 차용하였으며, 에드가 드가(Edgar Degas) 또한 인물 사진을 그리는 데 있어서 카메라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3 러시아의 혁명가 알렉산더 헤르젠(Alexander Herzen)은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1864년 런던 방문 광경을 신문에 긴 사설로 전하며 사진의 뛰어난 모방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곳의 분위기 전달을 위해 내가 구석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을 글과 함께 게재한다. 항상 그렇듯이, 사진은 나의 글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사진 안에는 우연히 찍힌 순간들이 잡혀(seized)있으며, 유지(retain)되어 있다. 어색한 옷의 주름과 사람들의 포즈, 굳은 얼굴 표정과 과한 세부 장식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 벌어진 전혀 손대지 않은 순간의 상황들까지도 말이다.”4 헤르젠이 글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진의 뛰어난 점은 사진은 한순간을 잡고, 유지하며 그에 따라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의 사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인간의 눈이 인식한 이미지의 가장 닮은 꼴로서, 사진은 이백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실을 “빠르게 재현해 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기능해 왔다.5

그러나 박진아의 작업 과정에서 순간을 빠르게 모방해내는 사진의 특징은 회화로 번역이 될 때 오히려 약점으로 작동한다. 영상이 아닌 사진이 잡아낼 수 있는 닮음은 찰나의 한순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연속적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사건(Event)의 총체성을 회화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한 컷의 닮은 이미지,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연속적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이용하여 회화적 실험을 진행해왔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한 <로모그래피> 연작에서 작가는 미묘한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찰나와 연속이라는 이중의 시간성을 잡고자 노력하였다.6 이 작업은 0.5초에서 1초의 사이에 찍힌 동일한 피사체를 여러 장의 그림에서 반복하여 재현함으로써, 피사체를 바라본 순간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순간까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나 작가의 회화는 빠르고,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뭉개진 붓질로 표현된 순간들의 합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로모그래피> 이후 박진아는 <공원의 새밤> 시리즈와 <문탠> 시리즈 등을 통하여 사진이 제공하는 순간의 합을 넘어서서 사진을 회화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실험해 나간다. 특히 밤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라이팅이 제한된 밤의 특성상 작가가 시각적으로 인지하고 느끼는 경험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카메라가 촬영한 화면과 작가가 직접 본 광경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이 만들어내는 카메라의 눈과 작가의 눈의 차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데,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 변형된 인물과 배경이 재현된 사진의 구도를 회화로 옮겨보는 것이다. <문탠> 시리즈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본인이 본 풍경이 아닌 카메라에 담긴 풍경을 선택하였으며, 이에 따라 무대 배경처럼 평면화된 검은 배경 위에 납작한 인물들을 배우처럼 선명하게 배치하였다.7 물론, 이렇게 카메라의 눈에 따라 배치된 이미지라고 하여 카메라가 캡처한 한순간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회화는 여러 순간의 이미지를 재조합하여 합성한 사건의 총체를 표현하고자 한다. 카메라의 눈은 총체성을 강화하는 한 가지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회화에서 사건의 총체성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여기서 총체성은 사회적인 인지와 이해를 가진 주체로서의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결합한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나 짜임관계(Konstellation)를 통해 다양한 주체와 객체가 서로 얽혀 현실의 다층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총체성과는 다르다.8 오히려, 회화가 전달하는 총체성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들뢰즈적인 사건이 통합되는 통로로서의 총체성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사건은 계속해서 변화하는(becoming) 상태이며, 서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action)와, 행위를 생산하는 몸(body)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9 어떤 사건이든(혹은 대상이든), 시작과 끝을 확정할 수 없으며, 중간 과정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행위들은 사건의 가능성을 평행우주처럼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회화가 총체적으로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회화 또한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becoming)에 머물러야 한다. 즉 사건의 상황을 관찰하는 화가의 몸도 함께 변화하며, 변화하는 몸이 만들어내는 재현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박진아는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회화로 마무리하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을 인지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일상에서 발견하는 흥미로운 장면과 제스처를 담아두고자 사진을 촬영한다. 하지만 어떤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캡처하는 것에는 그때그때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려 나가며 여러 이미지들을 합친다. 단단하면서도 느슨한 드로잉 사이에서 시간이 멈춘 듯도 하고 흐르는 듯도 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라고 설명하였다.10 2021년 작 <무대 정리 01>과 <무대 정리 02>는 공연이 끝난 후 정리를 하는 사람들과 정리를 기다리며 놓여있는 사물들을 그린 작업이다. 커다란 피아노를 어디론가 움직이는 사람들과, 의자를 옮기고 악보대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옮기는 사물이 주된 소재로 보이는 이 작업에서 인물들은 시간 속에 순간 멈춘 듯 보인다. 어정쩡한 순간에 멈춘 인물의 표정과 어색한 동작은 작가가 사진을 찍은 순간을 멈추어 박제해 놓은 듯하다. 반면 놓여있는 의자와 피아노, 악보대는 여러 개의 겹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무대 정리 02>에서 두 개의 의자를 한꺼번에 옮기는 사람이 들고 있는 의자의 다리는 마치 작가가 잘못 그어 내린 선들을 여러 번 수정한 흔적이 남은 듯 여러 개의 선이 포개어 있다. 겹쳐진 선들은 이 사물들이 분명히 그 자리에 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흔들리는 여러 개의 의자 다리 속에는 의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겹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흔들림은 인물과 사물의 배경에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무대 정리 01>의 피아노 뒤에 악보대를 감싼 빛과 빛이 밀어내는 그림자 사이에 불분명한 경계와 모호한 빛이 만들어내는 바닥과 벽의 흐린 경계는 작가가 그린 것이 사진의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가 관찰한 장면의 총체적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의 기억들의 합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마치 의도한 것처럼 회화의 흔적을 남겨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변화에 속도감까지 부여하는데, <무대 정리 02>에서 흰색이 섞인 영역과 여러 색이 겹쳐져 어두운 그림자가 된 영역은 어지러이 붓질이 된 방향에 휩쓸려 악보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혹은 그 반대로, 함께 춤춘다. 작가는 그려진 이미지가 어떤 대상의 재현인 동시에 물감 덩어리라는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무대 계단에 흘러내린 물감자국은 붓으로 그리다 우연히 남겨진 흔적일 수도, 실제 무대 계단에 남겨진 페인트 자국일 수도 있다. 그림 전면에 희미하게 세로로 그어진 선들이 붓질의 자국일수도, 작가가 무대정리를 바라보던 순간에 목격한 조명의 효과일 수도, 혹은 우연히 찍힌 사진에 남겨진 빛의 잔영일 수도 있다. 이 그림들은 그림이 멈추고 흔들리는 시간과, 대상과 사진,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여정 전체를 뒤섞어 재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간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현재에 머물다 과거로 소급하기도 하며, 우리가 보는 이미지들은 대상이 되었다가, 사진의 닮은 꼴이 되었다가, 다시 물감으로 칠한 회화의 덩어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작가는 선택하는 장면, 회화의 시작점에서부터 끊임없이 변하는 사건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을 즐겨하는데, 이에 따라 어떤 사건이 끝나고 난 직후, 혹은 직전의 모습을 총체적 재현의 소재로 선택한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떤 것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큰 관심이 있으며, 완성된 것들 이면의 이야기가 담긴 회화 이미지 제작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라고 설명하였다.11 <공공조각 02>(2021)와 <포장>(2021), <조명 담당>(2021)은 작가에게 익숙한 미술작품과 전시 설치, 혹은 철거의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사건이 완성된 전후를 담고 있으며, 사건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늦은 밤 거리에서 커다란 설치물이 설치되거나 철거되는 장면이나 뜻밖의 상황에 조명 담당자가 조명을 점검하는 모습은 작가가 바라보고, 사진으로 찍은 순간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상상하도록 한다. <조명 담당>에서 조명 담당자가 들고 있는 조명은 완성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의 일부이며, 조명 담당자는 점검이라도 하듯이 조명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게 되는데, 즉, 이 조명 담당자가 망가졌을지도 모르는 조명을 점검하고 있는 것인지, 조명의 위치와 밝기를 점검하는 것인지, 조명의 모양과 크기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인지 감상자의 경험에 따라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좌측에 살짝 등장하는 카메라와 카메라맨이 그 상상력에 힌트를 제공하는데, 카메라 속에서 조명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실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꼭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무엇이 준비되고 있는 상황이며, 작가는 이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회화 속에 과거의 상태와 현재, 미래의 기대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대 정리> 시리즈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인물이 들고 있는 조명 또한 노란 벽을 배경으로 연기가 일렁이듯이 움직인다. 반면에 수직적으로 배치된 조명과 인물을 나누는 바닥과 벽은 시선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의 흐름이나 붓질의 방향과 달리, 벽과 바닥의 구분은 일어나고 있는 인물과 조명 사이의 사건을 정지시킬 만큼 고정적으로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바닥과 벽의 구분을 통해 이 사건은 현실의 재현을 넘어서서 어두운 갈색과 밝은 노란색 면 사이에서 부유하는 무엇으로 초월하고, 이 장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압도적이고 강력한 색의 구분과 표면은 우연히 사진에 찍힌 것인가? 아니면 사건이 일어나는 현실의 색이 반영된 것인가? 아니면, 혹은, 이 색들은 다른 어딘가로부터 흘러 들어와 이 사건에 합류하게 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공공조각 02>과 <리허설 03> 등의 다른 회화작업들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공공조각 02>의 전면에 위치한 것은 푸른색 면의 덩어리이다. 설치하는 사람들과 유리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바닥, 배경의 희미한 나무와 건물의 모습을 누르고 짙은색으로부터 옅어지는 푸른색, 흰색에 이르기까지 이 푸른 면의 덩어리는 회화적 재현의 전면을 지배한다. <리허설 0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목은 “리허설”이지만, 넓은 바닥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작은 인물 두 명과 의자 더미들을 제외하면 화면 전체를 채우는 것은 조명으로 붉게 물든 푸른 바닥이다. 눈부신 오렌지색 조명이 거대한 바닥을 파란색과 주황색으로 물들이며 바닥을 홍해처럼 가른다. 그리고 이 바닥을 멈추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또 다른 직사각의 흰색 벽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이미지들이 사진의 닮음과 회화적 재현을 넘어서도록 한다. 사건은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추상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추상의 시작에 재현을 통한 지시적 욕망의 부재를 위치시켰다. 그에 따르면 현대미술의 출현은 회화, 혹은 시각적 이미지가 직접적인 욕망의 표현을 부정하고, 욕망의 방향을 지시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12 그는 회화의 타고난 본성은 감상자를 홀리고 사로잡아 이미지 앞에서 움직일 수 없도록 하는 “메두사 효과(Medusa Effect)”라고 분석하며, 이를 위해 현대 회화가 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감상자를 배제하고 연극적 효과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내부의 드라마(internal drama)를 통해 감상자의 몰두(absorption)를 성취하는 것이 회화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13 프리드의 이러한 관점은 감상자의 시선이 캔버스 내부의 색과 면, 선으로 수렴하는 추상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동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사건과 사진, 작가의 회화적 번역을 오가는 박진아의 이미지에서 직접적인 재현의 욕망을 넘어서 푸른색과 주황색, 혹은 흰색의 덩어리와 붓질로 소급되는 화면은 회화에 내부적인 논리를 부여하고, 색과 형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내부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러한 내부의 스토리텔링은 직접적인 재현으로부터 회화를 해방시켜 특정한 사건과 인물로부터 거리두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추상이 만들어 낸 빈 공간에 무한의 이야기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화면 속, 시선을 사로잡는 추상의 덩어리들은 실제의 사물과 배경, 현실로부터 출발하였지만, 동시에 작가가 사진이 잡아낸 순간의 이미지를 재조립하고 재해석하며 회화를 그리는 과정 가운데 만들어진 (가상의) 내부 드라마인 것이다.

추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프리드가 바깥을 향한 지시적 욕망을 부정하고 캔버스 내부의 갈등과 긴장의 서사를 강조하였다면, W. J. T 미첼(W. J. T Mitchell)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에 따라 프리드의 욕망의 부재 또한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무제(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Untitled(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1981)를 분석하며 무엇을 재현하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시선을 가진 돌 얼굴의 옆면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무심함을 폭력적이고 불길한 제목과 대조하였다. 이 돌 조각의 이미지는 아무것도 지시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 작가는 “얼굴(뺨)을 때리는(Hits) 당신의 시선”이라고 표현한 제목을 통해 욕망을 품고 지시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 얼굴을 바라보는 감상자임을 공표한다. 석상은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읽힐 수 있으며, 그림자 속에 교묘하게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이미지와 텍스트 읽기가 소환하는 것은 감상자의 생각(혹은 편견)과 이를 호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다.14 박진아의 작업에서도 재현의 욕망이 제거되고 회화적인 형태가 내부의 드라마를 생성할 때, 제거와 생성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욕망이 등장한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밤 나무>를 읽어보자. 작가는 어둠 속에서 본인이 관찰한 나무를 사진 찍었으며, 여러 장면을 조합하여 회화를 완성하였을 것이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실루엣이 고정되지 않고, 빛의 광원은 등장하지 않은 채, 이 회화는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간대의 총합으로 완성되었으며, “밤 나무”라는 사건의 총체적인 전모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 이미지에는 크루거의 옆얼굴만큼이나 지시적인 재현의 욕망이 부재한다. <밤 나무>는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실제 사물의 닮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재현의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에 메두사의 머리처럼 시선을 사로잡도록 위치한 것은 회화 내부의 드라마이다. 검푸른 녹색의 덩어리는 흩어지고 모이며 번뜩이고, 녹색과 검은색은 모호한 경계에서 끝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캔버스의 가장자리의 검은 밤은 붓질이 이끄는 대로 수없이 뻗어 나가 수평으로 퍼져 간다.

이 내부의 드라마가 그리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미지가 아닌 제목에 해답의 끄트머리를 붙들어 놓았다. 감상자의 몰입을 불러오는 이 추상적 회화의 덩어리는 여전히 “밤 나무”이다. 이 회화가 그려 나가고 생성해내는 내부의 드라마는 “밤 나무”가 불러일으킨 (과거의) 작가 내부의 소용돌이이며, 비지시적인 회화의 강렬한 표현과 “밤 나무”라는 제목이 불러일으킬 (현재와 미래의) 감상자의 내부의 소용돌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소용돌이는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며, 고정되지 않는다. 회화적 대상에 대한 인지는 이미 지각 속에 가지고 있는 이해로부터 출발하며,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들과의 끝없는 비교, 분석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15 W. J. T. 미첼은 이러한 내부의 소용돌이를 회화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내부의 소용돌이가 일으키는 이미지의 인식과 해석을 통해 회화는 문자와 말과 차별화되는 커뮤니케이션 기호로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내부의 소용돌이를 거쳐 전달되는 회화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animated) 기호이며, 그 기호를 해석하는 주체는 온전하게 독립적이거나 완전히 분열된 자아가 아닌, 서로 다른 경험과 기능을 갖고 동시대 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각성을 오가는 존재(go-betweens)로서, 회화를 통해 이해와 해석을 증식 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회화라는 기호가 전달하는 것은 감상자의 욕망이나 작가의 의도, 심지어 회화의 형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회화는 스스로 의미 값을 고정하는 대신,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신의 의미가 수집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15 즉, 회화작업 <밤 나무>가 그리는 것은 밤 나무에 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상상과, 현실의 총합인 셈이다. 과거의 작가가 본 이미 존재하는 밤 나무와, 작가가 기억하는 밤 나무들. 회화적으로 표현된 현재의 밤 나무들과 사람들이 보아온 또 다른 밤 나무들. 상상해온 가상의 밤 나무들과 밤 나무의 기억과 느낌, 감정과 색감, 선과 면. 그리고 밤과 나무를 해석하는 사회적인 상징과 의미가 합쳐진 사건의 총체로서의 새로운 기호로 회화 <밤 나무>는 완성된다.


  1. Ernst H. Gombrich, Art and Illusion (London: Phaidon, 2001), 11-12.  

  2. Gombrich, 앞의 책, 119-120. 

  3. Meyer Schapiro, Impressionism: Reflections and Perceptions (New York: George Braziller, 1996), 114, 168. 

  4. Alexander Herzen, My Past and Thoughts, The Memoirs of Alexander Herzen, vol. V, trans. Constance Garnett (London: Chatto & Windus, 1927), 35.  

  5. Schapiro, 앞의 책, 46. 

  6. 이성휘, 「안부를 전하며 2019」, 『Night for Day: 박진아』(서울: 헤적프레스, 2020), 200. 

  7. 박진아, 「밤에 벌어지는 일들」, 『Night for Day: 박진아』(서울: 헤적프레스, 2020), 220. 

  8. Timothy Bewees and Timothy Hall, eds., Georg Lukács: The Fundamental Dissonance of Existence, (London: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11), 50; Theodor W.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 B. Ashton (New York: Routledge, 1973), 163-164. 

  9. Alain Badiou, “The Event in Deleuze,” trans. Jon Roffe, Parrhesia 2 (2007): 38. 

  10. 작가와의 인터뷰 중 (2022.3.29).  

  11. 작가와의 인터뷰 중 (2024.6.11).  

  12. Michael Fried, Absorption and Theatric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92. 

  13. Fried, 앞의 책, 51. 

  14. W. J. T. Mitchell, “What Do Pictures Really Want?,” October 77 (Summer 1996): 80. 

  15.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eds.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W. Sherburn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