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17~11.27)
전시도록 서문
‘여가’처럼 그리기의 문제
글.이은주(큐레이터, 미술사)
박진아의 최근작들에는 화면이 4개로 분할된 반복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은 렌즈가 4개 달린 로모 카메라로 포착된 실제 장면들을 그린 것들이다. ‘여가’라는 전시의 제목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작가가 포착한 모습들은 주로 특별한 일 없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팔을 뻗는다든지 오렌지 껍질을 깐다던지 무릎을 굽힌다던지 하는 매우 평범한 동작들이 주요한 내용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작업들 안에는 촌급을 다투는 사건이나 치열한 갈등과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없다. 이 지극히 평범한 행위들이 로모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과하면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느린 속도로 포착되는데, 장면들마다 드러나는 포커스와 동작의 미묘한 차이는 시간의 틈을 느슨하게 연장시켜놓은 듯한 한적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박진아의 근작들이 담아내고 있는 한가한 오후의 정경, 무언가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시간의 느낌과 같은 것들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나 일상의 소중함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견지하고자 하는 하나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진아의 어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은 실제 삶에서 야기된 장면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삶의 흔적을 강하게 각인시키려는 의도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슬쩍 스쳐지나가는 듯한 장면들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작업 속 일상은 생활의 무게를 전하는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티라던가 그 안에 내재될 수 있는 서사적인 내러티브들의 여지를 모두 걷어낸 지점에 놓여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동작들과 정황들은 그 특별하지 않음 자체를 드러낸다. 그의 화면은 딱히 의미를 부여할만한 사건을 파생시키지 않기에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정도, 하지만 결코 하찮게 느껴지지 않는 정도의 존재감을 매우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가’라는 제목은 박진아의 근작들의 발생 지점을 유추할 수 있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박진아의 작업이 발산하는 느슨함과 여유는 비단 로모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연속적 시간성에서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생산과 노동의 꽉 짜여진 구조에서 비껴있으며 사회적인 생산가치로서 전환되지 않은 소재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는 것과 같은 느낌의 소소한 행위들로 채워진 그의 화면들은 어떠한 사회적 행위가 되는 특정한 ‘일’의 무게로부터의 일탈 혹은 저항을 담보한다. 그렇다고 이 작업들이 생산적 노동의 반대급부로서의 ‘유흥’에 천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과 유흥이라는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구조 양극을 모두 비껴서 있는 여백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박진아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한가로움은 바로 이 여백에서 비롯된다.
구름 흘러가듯 한가한 이 느낌은 언제든지 다시 흘러갈 것을 전제하고 있기에 스틸 라이프(still life)처럼 정지된 씬(scene)을 ‘포획’하고 있지 않다. 박진아는 어쩌면 이러한 느낌을 통해서, 구축되고 성취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한 순간의 프레임 안에 모든 것을 응축시켜 표현해야하는 전통적 회화평면의 모럴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박진아의 근작들에는 단호함과 집요함을 필요로하는 ‘응축’된 것들이 배제되고, 대신 4개의 연속적인 시퀀스들이 만들어내는 완만한 ‘흐름’이 놓여진다. 하나의 포커스가 아닌 4개의 포커스, 하나로 완결되는 장면이 아닌 4개의 연속적 장면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모든 요소들이 응집되어서 어떤 단일하고도 핵심적인 내용을 한번에 전해야하는 2차원 회화 평면의 사명을 살짝 비껴간다. 기법에 있어서도 힘주지 않고 스윽스윽 그린 듯한 느낌이 무언가 첨예하게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치열하게 응집시켜서 나오게 되는 회화적 완성도의 목적을 비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꽉 짜여진 구조를 담보하는, 밀도있게 완성된 마스터피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긴장감이나 카타르시스, 시각적 충격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다.
박진아는 로모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릴 때 여러가지 회화적인 표현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기회를 갖게 된다고 언급했다. 로모 카메라의 특성상 빛이 풍성한 야외에서의 가벼운 스냅사진을 주로 찍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들을 회화로 옮길 때 빛과 동작의 표현 문제와 더불어 사건의 순간적인 정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야하는 과제가 생긴다. 또한 카메라 렌즈가 4개이기에 생기는 약간의 앵글과 시간 차이로 인해 동일한 주제의 이미지 안에서 생기는 구도와 움직임, 빛과 같은 아주 미묘한 차이들이 좀더 부각되기 에, 화면간의 차이점들이 화면 안 행위 자체보다도 작품 속에서 더 중요한 요소로 인지된다. 박진아는 로모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4개의 화면에 의도적으로 더 차이와 변화를 주면서 어떤 것은 보다 더 정교하게, 어떤 것은 스윽스윽 그리는 식으로 운율을 부여하고 있으며, 장면들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해나간다. 4개의 시퀀스가 있기 때문에 포커스가 하나로 집중되지 않으면서도 그림을 하나로 그려야하는 문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박진아는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러한 과제들을 통해서 ‘회화의 완성도’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어아키(hierarchy)가 없는 수평적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작가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박진아의 근작들은 화면을 컨트롤하는 하나의 강력한 체계와 힘의 작용에서 벗어난 영역 안에서 가능한 회화적 완성도에 대한 실험이다. 이러한 모색을 통해 박진아는 전통적인 걸작의 신화들이 안겨주는 부담감을 전도시키면서 그것으로부터 비껴간 시선을 통해서 회화의 문제를 되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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